에세이

한발짝 등불로 십리를 간다

인솜니 2025. 5. 25. 11:12

예전에 내가 좋아하는 만화가가 지은 만화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뒤늦게 플룻을 시작한 주인공에게 플룻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신다. 네가 남들보다 늦었고, 그래서 뒤쳐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면 불안하고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차라리 주변을 보지 말고 고개를 숙이고 내가 걸어가는 요만큼씩의 길만 바라보라고.
 
그 대목은 두고두고 내게 생각났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끝없는 갈등과 저항 속의 결혼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시간을 주저앉아 가슴 속으로 울고 있을 때, 끊임없이 울리는 이 나이에 해서 무슨 소용? 아무도 너에게 그런걸 기대하지 않는데? 하는 목소리와 싸우면서, 차라리 지금은 아예 포기를 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어도 도.저.히. 포기가 되지 않아 가슴이 타들어갈 때.
 
그러다가 오쇼 라즈니쉬의 책에서 다음의 문장을 읽었다.
 
한발짝 앞이라도 보이는 등불이 있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십리 앞까지 보여야 십리를 갈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십리를 가야하지만, 십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근처까지라도 조망할 수가 없는 막막한 안개 속에서 번번히 엎어지고 주저앉고 무릎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좌절했지만,
 
그런데 아닌 것이다. 아니라고 한다. 한발짝 앞만 보이는 작은 등불에 의지해서 나는 한발짝을 뗄 수가 있고, 그 다음 자리에서 또 한발짝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멀리는 볼 수 없지만, 최소한 내 바로 앞의 구덩이는 피할 수 있으니, 용기만 있다면, 그만큼의 시력만 있다면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