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냉장고와 자아실현

인솜니 2024. 6. 9. 13:32

모든 부모는 자기에게 결핍되었던 것을 아이에게 주려고 한다.
 
나의 엄마는 한국전쟁 전에 태어났지만 어려서 전쟁은 기억하지 못 하고 전후의 어려운 시절을 기억하는 분이다. 그래서인지 엄마네 집에 가면 5개의 냉장고를 가득 채운 식료품의 넉넉함에 감탄하게 된다.(지금은 4개로 줄었다.) 들어보면 그 세대의 다른 분들도 다 비슷하다. 심지어 영업용 냉장고를 꽉꽉 채운 이야기도 들어봤다.
 
어떻게 애들을 잘 먹여야할까? 하루 밥 3끼니 먹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라는듯 엄마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오후 4시경만 되면 ‘오늘은 뭘 하지…’ 고민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세대는 어떨까?
 
나는 모든 물자가 부족하고 아껴써야 했던 70년대를 기억한다. 풍요의 80년대에 자라난 후배들과는 좀 세대가 다르다. 그래도 옷은 얻어다 입히면서도 책은 계몽문화사 전질을 현질해주던 엄마 덕에 좀 읽었다. 내가 어렸을 때 레고가 처음 나왔는데 나는 레고가 무척 갖고 싶었지만 우리집에는 비싼 레고는 당연히 없고 비스무리한 짝퉁만이 조금 있었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아니 저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수많은 의문들을 콩나물 시루 같이 빽빽한 학생들 속에 진도 나가는 것이 지상목표인 듯한 선생님들에게 제기하지 못하고 우물우물 삼켜버리는 습관을 반복학습하던 나는, 도덕 시간에 인생의 목표는 자아실현!이라고 배웠고, 그것을 잘 하기 위해서 참 열심히 살았지만 더 잘 살기 위해 결혼해서 애를 낳고 난 후에는…
 
나는 책과 레고를 무진장 아이에게 공급하였고 아이의 잠재성을 행여라도 짓밟을까 두려워하며 비폭력대화로 아이를 키우고 힘들게 유치원을 보냈다. 그러나 아들은 유치원과 학교와 친구들에 적응하는 것을 힘겨워했다. 나는 피아노도 노래도 발레도 다 시켜줄 수 있지만 아들은 아무것도 배우고 싶지 않아했다. 단지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어했고 책을 보고 혼자 놀았다.
 
만약 내가 아이들에게 완벽한 교육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답은 대안학교나 이민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건 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할 수 없었다. 나의 자아실현도 어렵지만 내 아이의 자아실현은 정말이지 어렵다.
 
나의 냉장고는 더 크고 무겁다.


인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