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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뒤돌아가는 것이 더 무섭다면

by 인솜니 2024. 10. 20.

관악산에 갔다.
 
지난번엔 아들이랑 둘이서 다녀오려다가 늦게 깬 딸래미를 데리고 오래간만에 올라가느라 힘들었기 때문에, 이번엔 혼자서 갔다.
 
저번처럼 약수터길로 올라가면 바위산길로 내려와야 되는게 싫어서(영 미끌미끌...) 바위산길로 올라갔는데, 계단이 생긴 다음부터 영 공중에 붕 떠서 걸어가는 것이 싫고 아래가 뻥 뚫린 것이 무서워서 쳐다도 안 보고 빨리 가던 길을, 오늘은 찬찬히 내가 옛날에 남편과 함께 아들을 데리고, 딸래미를 데리고 오르던 길을 살펴보았다. 보다보니 생각이 났다. 우리가 어떤 스텝으로 그 길들을 지나갔었을지, 자그마한 애들의 손을 잡아주며 오르던 그 모습이 그려지면서 반갑고 그리웠다.

가다 보니 예전에 수련하던 장소가 어디였나 보고 싶어서 왼쪽벼랑을 힐끔힐끔 찾아보는데 어디가 어디인지… 찾기가 힘들었다. 오래되기도 했고, 점점 흙이 무너져서 예전엔 꽤 넓은 자락이었던 공터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사라진 것인지, 어디였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보니… 갈수록 길이 너무 어려워지는데 어, 내가 저번엔 도대체 어떻게 올라갔지? 도무지 어떻게 올라갔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내가 올해 좀 큰일을 하느라고 관악산을 봄여름에도 전혀 못 가서 1년 이상을 못 다니기는 했지만, 그동안 내가 이렇게 힘들게 올라갔었나 싶고 내가 그사이 그렇게 상태가 안 좋아졌나? 싶기도 하고 좀 혼란스러웠다. 중간에 윗옷에 걸어놓은 선글라스를 떨궈서 뒤에 오던 분이 주워주시기도 하고, 뭔가 많이 이상했다.
 
그러다가 보니… 아래에서 올라갔던 큰 바위(지금은 계단을 덧씌워버린)과 뭐 거의 비슷한 레벨의 바위에 맞딱뜨렸다.

바람은 또 왜 이렇게 부는건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맞게 장갑을 챙겨오지도 않았는데, 낡고 닳은 운동화로 여기를 올라가려니, 왜 또 이리 딱 바위에 붙어서 지나가야할 길에 햇빛이 찔러대어서 방해를 하고 그래, 늘 매던 빨간 배낭을 아들 줘버려서 대신 산 연하늘색 가방이 때가 탈까 무서워 크로스백을 매고 온 것도 후회스러웠다.(크로스백은 어려운 길을 오를 때 흔들거려서 불편하고,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
 
내 바로 앞에 올라가던, 노년 부부 같은 분들이 여자쪽이 도저히 못 올라가겠다고 해서 다시 내려갔다. 나도 다시 뒤로 돌아갈까 생각하니 아까 올라온 가파른 길을 다시 내려갈 일이 더 무섭다. 경사도 가파르고 산등성이가 햇볕에 완전히 말라서 자갈이 도르르르 미끄려질 것이 뻔히 보인다.
 
앞으로도 갈 수가 없고 뒤로도 갈 수가 없는, 진퇴양난이다. 가만히 서서 생각을 해보려 해도 바람에 흔들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고, 앉아서 생각해보려고 해도 자리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왕민폐다. 바로 앞의, 도저히 나 혼자 힘으로는 건너갈 수가 없는 스텝을 바라보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갈 수 있을텐데, 과연 나의 깜냥으로 그런걸 청할 수가 있을까? 고민했다. 어떻게 말은 붙여봤지만, 더 이상은 무리다.
 
그러는 동안 또다른 팀이 나타나 척척척척 나의 고민은 짐작도 못하고 지나가는데, 문제의 구간을 다르게 옆으로 지그재그로 가는 것을 보니 저것도 말이 된다. 단지, 바람이 불고, 햇빛은 찌르고, 신발은 다 닳아서 접지력이 영 못 미더운데 바짝 마른 자갈과 흙은 상당히 미끄러워 보이고, 나의 근력과 민첩성은 전보다 많이 떨어져 있고… 작년에 허리 아파 그 고생을 했는데 만약에 떨어져 다친다면… 으악 정말 무섭다. 저쪽으로 떨어지면 완전 대형사고다.
 
뒤로 돌아 내려가는 것이 더 무서워 나는 올라가기로 했다. 장갑을 안 갖고 온 것을 후회하면서(갖고 오려다가 아직까지는 그 정도 날씨는 아니지, 하고 나왔는데 왠걸, 바람부니까 정말 춥다.) 바위에 딱 붙어서 한 발 한 손 조심스럽게 바위를 타고 올라갔다.
 
위까지 올라가니까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하는데 또 어려운 바위가 나타나서 식겁했다. 도저히 잘 하는 분들이 가는 구역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가장자리로 타고 가는데, 한 구역이 도저히 내 다리 길이로는 지나갈 수가 없는 스텝을 밟아야해서 다시 멈추고 생각했다. 아… 내려가는건 불가능인데…
 
앞에 가던 남자분이 도로 와서 도와줄까 손 내밀어서 얼른 잡았다. 정말정말 감사했다. 그 이후로는 올라갈 만했다. 올라가다 오니 왠 보지도 못했던 바위산이 계속되고, 태극기가 막 휘날리고 있는 것이다… 아 내가 길을 잘못 왔구나ㅜ;;;
 
거의 정상에 올라 아래 펼쳐진 산자락과 사당동을 보며 호연지기를 느끼며 뿌듯함에 젖는 사람들의 감정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 채, 나는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정상인데도 계단은 영 무서운 까닭에 얼른 아래로 내려갈 걱정만 했다. 올라오는 분들에게 물어보니 다행히 이쪽 길로 내려가면 사당역 가는 길이 나오려나 보다. 그제서야 안도했다.
 
내려가다 보니 맨날 우리가 ‘약수터 위의 운동하는 데’라고 부르던, 쉬어가는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가끔씩 국기봉으로 올라가던 길을 내가 지금 내려가고 있었다.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벤치에 앉아 별로 쉬지도 않고 얼른 집으로 가려다가, 바위산 가는 길로 갔다. 내가 어디서부터 착각했는지 알아보려고.
 
시간이 아까와서 나는 듯이 뛰어갔다. 죽다 살아난 몸이라 이런건 아무것도 아니라서, 왠일로 힘이 넘쳐나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젖은 돌 모서리를 그냥 딛고 뛰어갔다.
 
원인은 곧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수련하던 곳을 찾다보니, 거기에 매몰되어서 옆으로 빠져야 되는데 그걸 잊고서 직진을 한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길이 어려우면 이상하다고 생각을 해야할텐데, 나는 혼란스러워하기만 할 뿐, 멈추어 생각할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너무 힘든 길을 올라와버려서, 후퇴가 무서웠다.
 
익숙한 길을 내려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뒤로 갈 길이 더 무섭다면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낼 수 있다. 영 어려운 길이 나올 땐 누군가 나를 도와줄 수도 있다. 착각은... 안 해야겠다 생각하기엔, 착각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용기를 낼 수 있다면.
 
다음엔 익숙한 길로 해서 국기봉을 올라가봐야겠다. 내가 그동안 너무 도전정신이 없이 살살 다니기만 했다. 애들을 키우느라 그랬다지만, 이젠 다 컸으니까.


2024.10.20.

인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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